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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시대 힐링의 명소! 판미동
작성자 황금회 조회수 5563
게시일 2013-12-12 11:48
조선시대 힐링의 명소! 판미동
황금회 연구위원
배경
   근대적 발전은 지리적 위치의 이점을 의미하는 입지적 우위성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가 있다.
과거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면 한양에 근접한 입지적 우위성이 경기도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기도는 경제적 발전에 비해 역사적 성격이 잘 조명되지 않아 모호한 점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피난하기 좋다는 십승지(十勝地)나 청학동처럼 수양하기 좋다는 곳은 경기도로부터 아주 먼 지역에서 볼 수 있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한양중심 반경 100리에 이르는 한양생활권에서 이러한 현실적 이상을 실현하고자는 노력이 있었다.
한양과 가까운 곳에 현실에 바탕을 둔 수정된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경기도 조종현(현 가평군 소속의 옛 지명)에 판미동이라는 유토피아를 조성했다고 한다. 흡사 오늘 날의 힐링타운과 유사한 성격으로 조성된 후 100여년간 유지되었다.
판미동의 유래
   판미동은 현대판 힐링타운의 원형이며, 훨씬 더 체계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申奭, 1650∼1724)이 1674년 그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경기도 가평에 세웠다는 판미동(板尾洞)은 현실 개혁적 이상향이며 100년간 유지되었다고 한다.
현실 삶의 어떤 측면들을 부정하고 허무주의, 염세주의로 돌아가 지금 없는 것만을 꿈꾸지 않았으며, 실제로 원하는 삶의 모습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를 개혁한 새로운 이상세계를 직접 건설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깊은 산골에 향촌 자치의 이상 세계를 만들고 몸소 교화를 베풀어 이룩하였다는 판미동은 성공적인 운영으로 널리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황원구, 1982).
판미동의 선행과 자율규약
   흉년에 큰 가마솥으로 죽을 쑤어 굶는 사람에게 급식하고, 백포의 급량을 미리 확보하는 등 주자의 사창법을 모방하여 관가에서 하지 못한 일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신석의 교화를 통해 타 성씨가 백여호에 이르는 촌락을 형성한 적이 있었다.
   인본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정중하게 손님을 접대하고, 성실하게 공부(학업)하고, 생업으로 농사일을 했으며, 이로운 일에 집중하고 해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없애는 등의 덕업상권(德業相勸)을 실천했다. 정신수련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하극상을 금지하고, 도박 또한 금지되었다. 물론 유언비어와 미신이 금지되었다.
   병자, 가난한 자, 여행자를 돕고 상을 당한자에게는 협력하고, 억울한 자를 구원 등의 선행의 실천을 덕목으로 삼았다.
치유로 각종 질병 또는 노화 등의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추구했다.
또한 판미동 등의 유토피아에서 선조들은 문명의 이기를 가능한 멀리하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추구하였다.
판미동 예찬
   “쟁영화악진기북(?嶸華岳鎭其北) 이맹균(李孟均)의 시에, “일찍이 포천(抱川)에 가는 길에 굴파(屈坡)를 넘어서 안장(鞍裝)을 내리고 잠깐 조종(朝宗, 현 가평군 하면일대)에서 쉬었다. 어지러운 산 깊은 골을 뚫고 가는데, 한 가락 길이 꼬불꼬불 굽이고 많다.
비록 말을 꾸짖으며 걷고 건너기 어려워도, 이 고을에 이르니 마음이 이미 시원하다. 바로 명리장(名利場)을 벗어나 여기에다 살 터 잡고, 평생토록 거닐며 풍월을 즐기고 싶다” (원본 인용)
판미동의 재해석
   조선시대에서 유토피아는 그 당시 유행한 이른바 “신선이 모여 사는 곳”을 말하며, 이 신선이 모여 사는 곳은 속세의 때가 미치지 않은 깨끗한 공간이나 장소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서신혜, 2010, 조선인의 유토피아, 52-53쪽).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신선이 모여 사는 곳에 대한 해석으로 종교적인 색체가 없이 풍채가 좋고 장수하며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조용한 공간이자 장소“라는 의미로 변모한 것을 알 수 있다고 재해석하고 있다 (서신혜, 2010, 조선인의 유토피아, 52-53쪽).
   따라서 조선시대 판미동은 봉건질서 속에서 이상세계의 구현을 시도한 사례로 현실 삶을 부정하기보다 실제로 원하는 삶의 모습과 현실의 문제를 해소한다는 새로운 이상세계를 직접 실천하였다.
조선시대 당시에 깊은 산골에 향촌 자치의 이상 세계를 만들고 몸소 교화를 베풀어 이룩하였다고 널리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판미동은 도교적인 초월의 차원이 아니고, 불교적인 내세적 피안의 세계도 아닌 현실 세계에서 추구하는 이상향으로 볼 수 있다.
판미동의 시사점
   첫째, 몸과 마음을 양생하는 장소로서 한양의 배후지역으로 직장인들이 휴식을 취하며, 제2의 도약을 도모하는 장소로서 역할을 하였다.
각종 질병 또는 노화 등의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서신혜, 2010, 조선인의 유토피아, 100-101쪽).
   둘째, 귀향을 위한 장소로 판미동은 조선시대의 벼슬아치들이 벼슬을 하지 않을 경우 낙향하거나 귀향하기 적정한 곳이다.
당시 최적의 귀향지역은 한양 100여리에 위치 한 곳이라고 한다. 벼슬자리에 있지 않는 대기문벌(待機門閥)들이 한양과 근접한 북한강 및 남한강 인근에 많이 살았다. 한양으로부터 대체로 백여리(39.2㎞)안에 살고 있다가 왕으로부터 벼슬이 하사될 경우에 대비하여 지근거리에 살면서 최대한 빨리 한양중앙관아로 달려갈 수 있어야 했다.
실제로 경기도 조종현(현 가평군 포함)에 판미동을 창시한 신석의 자손이 한양 벼슬길에 오른적이 있기도 하는 한양 생활권으로 보인다.
가평군 판미동 : 또 하나의 조선시대 청학동이자 힐링을 위한 전형

<판미동 추정위치>

판미동 추정위치_황원구,1982

출처 : (황원구, 1982)

<판미동 추정위치>

판미동 추정위치_네이버지도

출처 : 네이버지도

<하면 상판리>

하면 상판리_직접촬영01

출처 : 직접촬영

<하면 상판리>

하면 상판리_직접촬영02

출처 :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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