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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보고서 상세내용
제목 사회 개선과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인문학 교육 방안
저자 최태욱,김성우,한보희,오재호 과제분류 위탁연구과제
발행월 2020-11 보고서번호 2020-67
원문 PDF 국문요약 PDF
보도자료 외국어 요약 English
인포그래픽스
1990년대 이후 줄곧 심화되어온 신자유주의의 각종 폐해로 인해 한국이 세계 최악 수준의 ‘격차 사회’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그 적폐의 수많은 결과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20 대 80’으로 굳혀진 양극화 상황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일상을 불안감과 패배감 속에 지내고 있다. 특히 ‘삼포 세대’라고 불리는 현 시기 청년 세대의 무력감과 좌절감은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의 미래는 없다’는 말이 기우만은 아닌 듯싶다. 대다수의 한국 시민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살아 내야 하는 각자도생의 정글 사회를 살고 있다는 말도 단순한 과장은 아니다. 관련 통계들은 한국이 ‘거칠고 품위 없는 사회’, ‘대립과 대결의 사회’, 그리고 이미 ‘공동체의 위기에 빠진 사회’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심각한 사회통합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IMF 관리체제를 겪고 난 이후 최소 20년이 넘도록 정계와 관계,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시민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지적하고 걱정하고 논의해왔지만 아직 뾰족한 해법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대체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물론,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가 그러하듯, 해법은 제도 아니면 행위자 혹은 그 두 변수를 동시에 수정해나가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사회가 경주해온 노력은 주로 정책과 법을 포함한 제도 변수를 고쳐보려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분야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김대중 정부 이후 현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는 20여 년 동안 수많은 정책과 법, 제도를 해법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소득 및 자산 양극화의 지속적인 악화 양상이 웅변하듯, 그 제도 해법들은 별다른 사회개선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결코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 분명히 확인된 것은 하나있다. 법과 제도 변수의 조정만으로는 (적어도 그것만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적폐와 그에 따른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도 변수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준 최근 사례가 있다. 바로 2019년의 선거법 개정이다. 이는 승자독식이 아닌 상생과 연대의 사회, 대결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사회를 염원해온, 그리하여 다당제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바라온 개혁 지향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진보 학계의 오랜 노력이 일부나마 그 결실을 맺은 것이라는 평가를 받은 (보기에 따라서는 역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도 변화였다. 줄곧 ‘상대 다수제’였던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비록 ‘준’(準)자가 붙긴 했어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뀌었으니 그런 평가가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 새로운 제도로 치러진 첫 선거인 2020년 총선은 과거보다 더 악화된 비례성, 더 강화된 양당제, 더 심화된 승자독식의 대결 정치라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을 반대해온 양대 정당이 (시민들의 시선이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선거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하는 온갖 꼼수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마구 펼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대 정당이 그토록 무도하게 굴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새 선거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낮다는 것, 다시 말해서 시민들은 어차피 그 법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별로 중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것이 제도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행위자가, 즉 시민이 변해야 사회가 개선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제도만이 아닌 다른 변수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제도 변수 조절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제도 개혁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행위자 변수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정책과 법, 제도 개혁에 들인 시간과 에너지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반만이라도 행위자 변수의 조정에 투입하자는 것이다.
본 연구는 행위자 변수의 개선 방안으로 인문학 교육의 심화와 확대를 제안한다. 인문학 교육을 통한 시민의식의 변화가 느려 보이지만 어쩌면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게 바로 지속가능한 해법이리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비되는 인문학의 핵심 성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찰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표현이다. 우선 성찰성에 대해 얘기해보자. 인문학은 사물 혹은 대상(object)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주관적 존재(subject)를 그 인간 스스로가 (역시 주관적으로 혹은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러기에 인문학은 과학이 아니라 성찰이다. 인간을 탐구해 느끼거나 깨달은 바를 탐구자인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 그 둘 사이를 연관 지어 놓은 후 자기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는 과정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한편, 인문학은 인간이 인간을 주관적으로, 즉 멋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학문인만큼 그 표현도 멋대로인 것, 즉 자유로운 것이 당연한 학문이다. 또한 인문학의 목표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기술(記述), 논리나 이론을 통한 일반화, 유용성이나 효용성의 확보를 위한 지식의 응용 및 축적 등이 아니므로 그 표현 방법이 정형화될 이유도 전혀 없다. 자유로운 표현이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학문이란 것이다.
인문학 교육의 사회개선 효과는 대개 인문학의 이 두 가지 핵심 성격이 ‘교육 일반의 사회개선 효과’와 연결되어 발생한다. ‘사회는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사회를 만든다.’라는 인간과 사회 사이의 변증법적 순환과정은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둘 사이의 매개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사회가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며, ‘인간이 사회를 만드는 혹은 개선하는 과정’은 그 교육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활동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 일반의 사회개선 효과이다. 곧, ‘교육이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이 (교육받은 대로) 사회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동서고금 인문주의자들의 공통적 주장대로 인문학의 자기 성찰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도록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문학 교육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품위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인문학의 성찰성이 품위 있는 사회 만들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는 거의 언제나 ‘주체적 자아’의 발견이다. 그리하여 그 성찰자는 주체적인 삶, 즉 자치와 자유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정치사회에서도 자신이 주체이며 ‘民主’主義의 그 ‘主人’인 바, 자신은 마땅히 ‘정치적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성찰이 계속되면서 그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타인도 삶과 세상의 주체이며, 따라서 타인을 지배나 통제의 대상이 아닌 공감과 협력의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 요컨대, ‘인문학 교육이 성찰능력과 공감능력을 갖춘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만인평등․만인자유의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인문학의 성찰성이 민주주의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인문학의 자유로운 표현과 관련된 사회개선 효과이다. 사람들은 ‘멋대로’ 표현한 인문학을 대하면서 인간의 다양성과 삶의 다면성을 당연하고 정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판단이 결코 단순하고 일방적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용인하고 수용하게 하며, 심지어는 다름을 권면하고 부추기게도 한다. ‘인문학 교육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다원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인문학의 자유로운 표현이 다원주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서양 고대(古代)의 ‘파이데이아’와 ‘후마니타스’, 서양 중세(中世)와 르네상스의 ‘자유학예’, 동아시아의 유학과 인문적 자유교양으로서의 ‘수양’, 서양 근대의 ‘빌둥’ 그리고 현대의 ‘리버럴 아츠’ 인문교육운동 등을 살펴봄으로써 인문학 교육의 사회개선 효과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시도해보았다. 그리하여 인문학 교육은 당대에 곧장 효과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에 걸쳐 서서히 사회의 정신적, 심리적 체력을 강화함으로써 한 사회가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균형을 회복하는 힘(Resilience)을 길러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문학 교육은 장기적 과제로 수행해야 할 사회개선 해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문학 교육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리에게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인문학 교육 사례는 주로 미국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 로마 시대에 시작된 인문학 교육은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와 19세기엔 영국에서 꽃을 피우는데, 영국의 그 선진 인문교육 체계가 미국에 계승되어 19세기 이후론 (그리스도, 이탈리아도, 영국도 아닌 미국이 자유교양 혹은 리버럴 아츠 교육의 본 고장 대우를 받게 될 만큼) 거기서 인문학 교육이 유례없이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대학 수준에선 단연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AC) 체계를 모델로 삼을 만하다. LAC는 통상적으로는 ‘적어도 절반 이상의 학위를 인문학 분야에 수여하는 대학’을 지칭하는데, 미국의 LAC는 크게 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세인트존스 칼리지와 같이 단일 인문학 대학으로 운영되는 경우와 컬럼비아 대학교의 컬럼비아 칼리지처럼 대형 종합대학교 안에 나름의 자율성을 갖춘 부속 대학으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한국의 인문학 교육 강화와 확산을 위해선 LAC의 육성과 양산이 가장 좋은 방안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정부의 LAC 육성책이 필요하다. 세인트존스나 컬럼비아 방식 모두에 있어 한국의 중앙과 지방정부가 수행할 수 있는 육성 및 지원책은 다양하다. 세인트존스 방식의 경우 정부는 국립이나 도립 LAC를 신설할 수 있다. 혹은 그러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민간 주체를 엄선하여 재정적이나 행정적으로 도울 수도 있다. 컬럼비아 방식의 경우 정부가 기본 요건을 제시하여 그것을 충족한 기존 대학교의 일부 혹은 전부를 대상으로 하여 역시 재정 및 행정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소위 ‘LAC 선도대학’을 선정하여 집중 투자하는 것도 좋은 자극책이 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기도는 상기한 육성 및 지원책을 ‘경기도 버전’으로 만들어 도내에서 집행하면 된다.
대학이 시민사회를 끌어안은 형태의 인문학 교육도 참조할 대상이다. 미국에선 인문학의 공공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어왔다. 소위 ‘사회운동으로서의 인문학’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공공인문학’(Public Humanities)이다. 문학, 역사, 철학, 대중문화, 예술과 같은 주제에 대해 일반 대중을 위한 강연, 전시, 공연 등을 촉진하고 제시함으로써 ‘학계 인문학’과 ‘대중 인문학’을 연계 혹은 통합하고, 그럼으로써 인문학적 성과를 사회적 유대와 시민적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 활용하는 것이다. 경기도가 자체적으로 이런 성격의 공공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제도권 밖에서의 인문학 교육도 물론 중요한데, 이는 굳이 미국에서 모델을 찾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한국에는 국가교육기관 외부에서 인문주의 전통을 만들고 유지해온 오랜 민간교육의 전통이 있다. 서원과 서당은 물론 동학운동, 노동운동,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시민사회운동 등과 연관된 수많은 민간 교육 체계가 모두 그러한 것들이다.
경기도는 지금도 도민들을 상대로 하여 좋은 인문교육 프로그램을 몇 가지 진행하고 있지만, 거기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인문학 사업을 추가적으로 운영해보길 제안한다. ‘창작인문학’, ‘사회인문학 응급실’, ‘노장년의 고전 다시 읽고 쓰기’, ‘미래의 역사 인문학 카페’, ‘환경생태 인문학’, ‘테크놀로지 비평 인문학’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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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18-04-13